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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제작 발표 소식부터 많은 서바이벌 매니아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문제작. 정종연 PD의 데블스 플랜이 드디어 첫공개됐다. 두뇌 서바이벌은 언제나 마이너한 장르의 입지였지만 올해는 더 타임 호텔, 피의 게임 2등 꽤나 굵직굵직한 서바이벌이 나왔다. 어쩌다보니 OTT에서 하나씩 내놓으며 경쟁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셈. 
 
 01. 원조는 때깔부터 다르다
 확실히 때깔이 다르다. 지니어스 이후 국내에서도 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솔직한 말로 수준미달의 작품이 대다수였고.. 올해 들어서야 더 타임 호텔이나 피겜 2가 퀄리티로 칭찬 받는 케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당연한 것이 서바이벌은 연출/기획/자본 투자 등등 굉장히 많은 것들이 충족되어야 하는 장르니까. 
 그런 의미에서 데블스 플랜에 대한 많은 이들의 기대는 사실상 정종연 PD에 대한 기대였을 것이다. 그는 국내에서는 미개척지였던 두뇌 서바이벌의 물꼬를 튼, 말하자면 원조집이고 언제나 연출력으로 인정받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장르 팬 입장에서는 뭐가 달라도 다를 거라는 기대가 있는 상황. 결론적으로는 이러한 기대는 확실히 충족시킨 느낌. 그냥 때깔이 다르다. 연출도 좋고 구성도 좋다. 밑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게임도 퀄리티가 높다. 이런 부분에서는 역시 걱정할 것 없어 보인다.
 
(다만, 넷플릭스라는 특성 상 기존 그의 프로그램의 특장점으로 꼽히던 자막/배경음악이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는 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이건 누군가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냥 개인적인 아쉬움)
 
 02. 메인 매치
 게임 서바이벌이다. 어떤 걸 보여주고 싶은 지는 게임 속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가령 더 타임 호텔은 게임의 '플레이' 난이도가 전반적으로 높았다. 특히나 순간순간의 빠른 계산력과 판단력을 굉장히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령 첫 회의 2대2 가위바위보는 지배인 카드가 공개되는 것과 동시에 신속한 계산을 요했고, 이런 요소는 코인 시세 조작, 사칙 연산 로또, 카르마 나인 등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러한 특성이 보드 게임 기반이 아닌 자체 제작 게임에서 더 잘 드러났던 걸 보면 이것이 제작진의 의도였음은 명백하다. 더 타임 호텔의 게임은 '진짜 머리가 좋은 사람을 뽑아야겠다'라는 목적 하에 만들어졌다.
 피의 게임 2의 경우는 게임이 훨씬 간결하다. 그 편이 정치 싸움으로 몰고 가기 쉽기 때문이데. 피의 게임은 정치 싸움과 갈등이 메인이니 게임을 의도적으로 간결하게 만든 것이다. 소사이어티 게임도 마찬가지. 시즌 2에서는 챌린지가 재미없다는 피드백을 받아들여 상당히 어려워지긴 했지만 시즌 1의 경우는 정말 의도적으로 게임 난이도를 하향시켜놨다. 누구나 결승전에 갈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감각'이라는 분야도 따로 만들어 뒀다. 이 역시 정치가 메인이기에 한 의도적 설계라 볼 수 있다.
 
 그럼 데블스 플랜은 어떨까? 게임의 룰만 보면 상당히 길다. 일순 복잡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플레이 하다 보면 시청자며 출연자며 아무도 낙오되지 않을 만큼의 난이도다. 너무 어렵지도 않고 너무 쉽지도 않은 딱 적당한 난이도다. (여기서 적당하다는 표현은 그것이 꼭 최고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했듯 게임의 난이도를 포함한 많은 부분들은 프로그램의 지향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단조롭지 않도록 게임 주변 요소들을 굉장히 세심하게, 그리고 스타일리쉬하게 채워 넣었다. 가령 1R 게임에서 수사관이 총알을 소비하는 방법만 봐도, 평범한 방법을 택하지 않고 '토지 책을 뒤집는' 방법을 택했다. 사실 어떻게 처리해도 상관 없는 부분이지만 이렇게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 쓰면서 게임을 좀 더 스타일리쉬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토지 뒤집는 연출은 1R 게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연출 중 하나다.
 2R도 마찬가지. 개인 규칙을 만드는 방식을 타일로 한 것도 꽤나 흥미로운 방식이다. '10칸' '20칸' 등의 굉장히 맛있어보이는 타일들을 만듦과 동시에 색깔이라는 요소를 통해 이를 활용하기 어렵게 한다. 이건 하나의 예시일 뿐이고 실제 타일들을 찬찬히 뜯어보다 보면 얼마나 고민하면서 배정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타일이라는 실체가 있는 도구를 활용해서 시각적인 임팩트를 주는 것도 좋은 지점. 그냥 방송에서 보여준 화면처럼 리스트업해서 보여줘도 플레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겠지만 타일을, 그것도 무더기로 쌓아놓으면서 이 역시 게임이 스타일리쉬하게 만들었다. 
 
 사실 게임 서바이벌은 게임 만드는 게 80%인데 이 정도면 믿고 봐도 될 듯.
 
 다만 가장 궁금한 포인트는 탈락자 명수가 픽스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방식으로 게임을 세팅했을지 하는 것. 물론 지나치게 탈락자가 적거나 많아지면 피스량을 조절하는 식으로 거시적인 조정은 가능하겠지만, 결국 당일 몇 명이 탈락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장 2R만 해도 한 명일지 둘일지 셋일지 아무도 예상 못하는 상황이었지. 실제로 게임 막판에는 주사위에 탈락자 수를 맡겨야 하는 상황이 됐고. 그렇다면 당장 준비한 게임을 몇 명이 플레이 하게 될지 제작진도 모른다는 뜻이다. 물론 다 대비야 했겠지만 이런 식의 진행은 처음이라 기대도 걱정도 크다. 뭐 사실 보드게임으로 따져도 인원수 정해진 것보단 안 정해진 게 더 많긴 하지만.
 
 03. 상금 매치
 데블스 플랜의 가장 큰 차별점이면서 동시에 현재 기준 가장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시스템. 메인 매치에서 실컷 싸우게 하고 협동 시킨다는 개념 자체는 참 재밌지만 아직까지는 솔직히 데스매치 시스템이 더 재미있긴 하니까. 앞으로의 진행이 기대되는 부분. 당연히 최종 상금이 어떻게 될지도 궁금하고. 올해 서바이벌들이 하나같이 지독하게 상금을 깎아먹어버려서 이번엔 최소 2억은 넘겼으면 하는 마음이 있긴 하다.
 일단 상금과 생존이 완전히 분리된 시스템은 긍정적이다. 상금 재화와 생존이 연계되면 죽는 것 보다는 거지 되는게 낫다는 마인드로 플레이어들이 상금을 막 쓰게 된다. 실제로 계속 언급하고 있는 더 타임 호텔과 피겜 2는 아이템 판매로 상금을 미친듯이 깎아먹었다. 그것과 비교하면 이게 훨씬 낫지. 피스로 협상이나 서열의 형성같은 기존의 역할은 다 할 수 있으면서도 상금은 또 상금대로 쌓을 수 있는 구조. 
 
 다만 현재 호불호 갈리고 있는 부분은 그래서 이게 재미있냐하는 굉장히 본질적인 문제로 파악된다. 솔직히 아직까지는 데스 매치 쪽이 더 쫄깃하고 재밌긴 하지. 메인 매치에도 좀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물론 서동주의 올킬은 최고의 명장면이긴 했지만. 그리고 전회 공개는 아니더라도 4-5개씩 몰아보게 되는 환경에서 메인 매치 사이에 낀 상금 매치는 어느 정도 몰입을 방해하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이게 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지금까지 나온 두 번의 상금 매치 역시 디테일한 설계가 포함되어 있다. 첫 게임에서 궤도가 주장한 것처럼 피버낫(피스를 버는 게 낫지 않아요?) 전략을 택했을 때 갈등을 유발하도록 최대 얻을 수 있는 피스의 수를 감옥 제외한 멤버들보다 딱 하나 모자르게 9개로 설정한 것도 그 중 하나다. 물론 너무 지나친 이상론이라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작은 규모로는 실제로 이러한 몰아주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갈등이 생긴 것은 덤. 두 번째 게임은? 마지막 10번째 문제는 '양자 택일' 문제다. 물론 제일 지엽적이고 어려운 문제긴 하다. 하지만 찍어도 50%. 파격적인 조건. 과연 그 상황에서 나는 내 피스 하나를 걸고, 그리고 막타의 책임감까지 짊어지면서 패스 하지 않을 수 있는가. 굳이 가장 고난도 문제를 2지 선다로 준 것은 아마 이러한 의도였을 것이다. 물론 1타 강사처럼 그 문제마저 적중시켜버렸기에 그런 그림은 나오지 못하긴 했지만. 
 그러니까 협동을 내세우면서도 지독하게 갈등을 유발할 만한 포인트들을 설계해 둔 것. 아직은 초반이니 다 적당히 넘어갔지만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게임이 만들어졌다면.. 또 어떤 그림이 나올지는 모를 일이다.
 
 덧.) 약간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첫 번째 게임인 '협동 퍼즐'은 말 그대로 조각 맞추는 게임이었고, 두 번째 게임은 제목부터 '기억의 조각'이라서 지속적으로 '조각'이라는 키워드가 강조되고 있다. 피스는 이름부터 피스고. 아마 각기 다른 피스를 합치면 뭔가 나오는 건 명백해 보임.
 
 04. 플레이어들
 서바이벌 경험이 없던 참가자들로 섭외하다 보니 라인업 공개 당시 파급력은 분명 약하긴 했다. 지금도 라인업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듯 보이고. 개인적으로는 잘 뽑았다에 좀 더 가깝다. 최근 서바이벌에서 주언규, 유리사라는 역대급 듣도 보도 못한 캐릭터가 나오다보니 아쉬운 소리가 더 나오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래도 이 정도면 만족.
 특히 정PD의 일반인 선발 능력은 항상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일단 김동재는 사실상 이번 4회차의 주인공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마음에 드는 캐릭터. 여기서 다시 한 번 일어서 준다면 굉장히 매력적인 서사가 될 것 같다.
 그 외에도 다들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 개인적으로는 가장 의외의 캐스팅이었던 박경림이 정말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지금 멤버들의 분위기를 만드는 가장 중심 인물이고, 또 감옥까지 다녀왔음에도 딱히 적이랄 것이 없는 실질적인 베스트 포지션. 나중에 떨어지더라도 본인의 플레이 미스가 있었으면 있었지 표적이 될 일은 없겠다는 생각. 
 그리고 애초에 초반 2일차까지 나왔는데 시청자들이 너무 많은 독기를 기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다. 사실 초반 플레이는 다들 저런 식의 탐색전으로 흘러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것도 이번 피겜의 강렬한 초반부와 비교되어 더 이렇게 된 건 아닌지..
 
 05. 총평
 아무튼 나는 재미있게 보고있다. 애초에 나 같은 사람들은 항상 서바이벌에 목말라 있기 때문에 좀 상한 것까지도 그냥 받아 먹으면서 살고 있는데(..) 이 정도의 파인 다이닝은 당연히 고맙게 먹게 된다. 치밀한 디테일도 그렇고 연출도 그렇고 게임도 그렇고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탄탄하니까 보면서도 그냥 행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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