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록/영화

엘리멘탈 (2023) / 두 갈래의 이야기, 그리고 한국

Seongwon32 2023. 6. 29.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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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멘탈은 픽사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의 하나로서 정말로 기대하던 작품 중에 하나였다. 원소들을 캐릭터화한다는 기본 컨셉 자체도 아 이건 픽사가 제일 잘 하는 건데? 하는 생각도 들었고. 픽사 작품 중에서도 인사이드 아웃을 굉장히 재미있게 본 입장에서 이건 기대할 수 밖에 없었다. 글은 다소 늦게 쓰고 있지만 개봉일날 보고 왔고, 이후에 더빙으로도 한 번 더 봤다.
 
두 번 봤다는 것에서 이미 짐작하겠지만, 나는 재밌게 봤다.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게 무슨 픽사의 최고작 자리를 넘본다 뭐 이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충분히 좋은 영화이자 재밌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실 엘리멘탈은 기대치에 비해 흥행 실적도 상당히 별로고, 평으로도 좀 많이 호불호가 갈리는 모양새다.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사랑스러움과 빛나는 창의력들을 외면할 수가 없다.
 
영화는 사실 장르적으로 보면 멜로, 로맨스 장르에 가깝다. 사실 거의 정보를 차단한 채로 영화를 봤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던 분위기가 아니긴 했다. 로맨스 장르로 보았을 때 양 극단의 캐릭터들이 사랑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서사 구조는 굉장히 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단순히 로맨스 장르 영화로만 봤을 때는 엘리멘탈이 그렇게 빛나는 영화같지는 않다. (물론 그렇다고 나쁘다는 건 또 아니고) 그냥 되게 예쁜 그래픽으로, 무난하고 아름다운 로맨스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느낌이지.
 
그렇지만 엘리멘탈이 그저 로맨스 영화인 것은 아니다. 엘리멘탈은 기본적으로 이민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엘리멘탈 시티는 이름으로 보면 불,물,공기,흙 네 원소가 모두 다 함께 살아갈 것만 같은데 영화를 보고 있자면 불의 원소들은 자기들끼리 집성촌같은 걸 조성해서 자기들끼리 모여 산다. 오프닝에 슬쩍 나오는 화면들로 보았을 때 엘리멘탈 시티로의 이주 역사는 물-흙-공기 순으로 이어져왔고 불이 가장 마지막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엘리멘탈 시티에 섞이지 못했다. 물에 의해 꺼져버리거나 혹은 반대로 물이 증발해버리거나 하기도 하고, 흙에서 자라난 식물들이 불에 닿아 타버리는 장면들이 나오는 걸 보면 물론 물리적으로도 같이 사는 데 다소 제한 사항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엠버의 부모님이 1세대 이민자로서 처음 집을 구하러 다닐 때 하나 같이 문전박대 한 것이나, 비비스테리아 일화를 보면 관념적으로도 어느 정도 서로 간의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물론 이는 불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실제로 엠버의 아버지는 물을 거의 혐오한다. 이외에도 엠버가 웨이드 가족과 식사를 할 때 "너는 우리 말을 아주 잘 하는구나"라는 대사를 악의 없이 던지는 장면 등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이민자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엠버와 웨이드도 서로에게 이미 사랑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접촉을 피하고 우리는 안 된다는 이야기도 하곤 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비비스테리아는 역시나 불 앞에서도 꽃 피울 수 있음이, 그리고 사실 불과 물이 서로 손을 맞잡아도 어느 한 쪽이 증발해 버리거나 꺼지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현상 (라이덴 프로스트 현상)이 일어남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사실 그 전 까지 그 누구도 정말로 그들이 접촉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확인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막연한 공포, 혹은 거부감이 그 확인을 막고 있었을 뿐. 엠버와 웨이드가 서로 손을 맞잡아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음을 확인하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이민자 이야기 외에 엘리멘탈을 끌고 가는 또 하나의 큰 축은 '자식의 책임감과 이로 인한 고뇌•갈등', 그리고 '감정'에 대한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한 불호평들 중에 꽤나 많은 평에서 '웨이드 캐릭터가 좀 너무 과하다'는 말을 한다. 사실 나도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어 좀 과한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양 극단의 캐릭터를 이용하는 서사 구조 특성상 당연한 거긴 한데 그건 그거고 나도 캐릭터 자체에 크게 막 정은 안 갔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영화를 관람하면서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엠버는 가게 일을 대부분 다 잘 소화하지만, 유독 손님 응대를 하는 데 있어서 분노를 참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이것 때문에 가게를 이어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했고. 그렇게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엠버는 웨이드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공감하는지, 그리고 경기장에서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는지를 묻는데 이 때 웨이드는 '그냥 네가 느끼는 대로 해봐라. 화가 나는 건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아서다' 라고 대답한다. 이 때 엠버는 이 말을 무시하지만, 이 때 엠버에게 말 한 대사를 생각해 보면 웨이드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첫 등장, 그러니까 우연찮게 가게 지하로 끌려들어와 위반 딱지를 떼는 장면부터 영화 내내 웨이드는 그냥 시종일관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 감정의 표현이라는 키워드가 영화 내내 등장하게 되는데, 엠버는 웨이드의 어머니가 유리 회사 인턴을 제안한 순간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게 되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그리고 이내 위에서 말한 웨이드의 말 뜻을 드디어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알게 된다. '나는 가게를 물려받고 싶지 않구나'. 가게는 아버지의 꿈이고, 또한 언제나 엠버에게 가게를 물려줄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셨고, 심지어 아버지는 최근 들어 부쩍 노쇠해지셔서 숯콩 만드는 것도 제대로 못하시고 있다. 그리고 엠버가 다른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상황이 바로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엠버는 자연스럽게 나는 가게를 물려 받아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진짜 자기 마음이 그런지는 사실 관심 밖이었다. 이전까지는 다른 길을 생각해본적도 없었으니까.
 
이런 마음을 웨이드에게 말하자 웨이드는 이 때도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면 분명 이해해주실거라며 부모님과 대화하기를 권한다. 그러나 엠버는 너는 모른다며 자기 마음을 묻어두기를 선택한다. 심지어는 웨이드가 한 번 더 아버지 은퇴식에 찾아가 자기 마음을 따를 것을 다시금 권했음에도 엠버는 끝내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후 일련의 사건에서 웨이드가 희생하고나서야 엠버는 부모님께 자신의 진짜 마음을 고한다. 나는 웨이드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가게를 물려받고 싶지도 않다고, 부모님은 웨이드가 예상했던대로 나의 꿈은 너였지 가게같은게 아니라고 말하며 모든 것을 이해해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엠버가 꿈을 찾아 인턴을 하러 떠날 때, 자신의 부모님과는 달리 맞절을 하면서 자식의 꿈을 응원해준다. 사실 영화에서 처음 '박소'가 언급될 때 부터 충분히 예상했던 결말이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서사가 쌓이고 나서 보니 역시 이 장면에서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엘리멘탈은 크게 두 줄기의 주제 의식을 원소라는 컨셉을 통해 아주 잘 표현한다. 그리고 특히 후자의 이야기는 유독 한국인들에게 통했던 모양이다. 예전부터 있었던 'K-장녀' 개념의 모습이 엠버와 완전히 겹쳐보이기도 하고. 그래서일까 엘리멘탈은 입소문을 타고 역주행에 성공해 국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한국계 감독이 부모님의 이주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확실히 우리나라에서 좀 더 좋아할 만한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들었다. 실제로 관람객평도 유독 한국인 평이 좋은 현상이 있기도 하고. 물론 픽사 입장에서야 아쉬운 결과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무튼 감동 받으면서 재밌게 잘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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